2020년, 밤비를 만나기 전까지섬유근육통이 그렇게 아픈 병인 줄 몰랐습니다. 학교에서 배우긴 했지만내가 배운 건 병의 무게를 걷어낸 건조한 글자의 나열이었을 뿐.많은 병을 그렇게 배워놓고많이 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밤비는 아주 어렸고, 5년 전 발병한 섬유근육통이 점점 심해지는 중이었고, 찬란한 나이에 발병한 병에 적응할 수 없었고,마음은 더욱 그러하였던 것 같습니다. 섬유근육통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도움이 되긴 할까,뭘 한들 되기나 할까 싶은 마음과 남은 생을 평생 진통제 한 웅큼으로 살기에는 너무 어려서 듣고만 있어도 아려오는 마음. 복잡하게 충돌하는 마음들 사이에서상담 내내 내 손가락을 씹고 있던 2020년의 그 날. 무슨 일인지 밤비는 저를 덜컥 믿기로 했고(아니왜) 일이 이렇게 되니 저도 더이상(갑자기) 느긋한 하루를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완치된 섬유근육통 케이스를 찾으러 나섰고그런 게 있나 싶었지만 찾았습니다. 그것도 제법 많이. 그들에게 썼다는 처방들을 모아모아 복기해보며왜 이렇게 썼을까, 이게 왜 필요했을까,이건 왜 효과가 있었을까, 공부를 역으로 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닥치는대로, 뭐라도 찾아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공부를 이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그건 나중에 생각하자고 미룬 채 계속 눈에 불을 켜고. 환자가 기대오는 무게가 나에게 일으키는 동력이이렇게나 큰 것인 줄 몰랐습니다. 그 때만 해도. 왠만큼 케이스를 복기한 뒤 알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과 밤비의 공통점은 섬유근육통이라는 병명 외에는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치험례를 따라 써볼 것인지밤비에게 맞춰서 내가(감히) 짜볼 것인지 기로에 서게 되었죠. 후자를 택했습니다. 저는 대범한 ....일 리가 없고..처방을 짜놓고도 심장이 쭈굴쭈굴마음을 많이 졸였어요. 한 1년쯤.비가 와도 걱정이고비가 안 와도 걱정이고마음만은 대통령됨 밤비의 증상은 오르락내리락을 거듭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대화에서통증 이야기가 차차 줄어들고어느 날부터는 좁쌀여드름, 알러지, 변비 등등통증에 비할 바 아닌 주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밤비는 좁쌀여드름에도 어찌나 진심인지세상 진지하게 여드름을 논했지만 그 사사로운 주제들이 어찌나 좋던지요.안 사사롭다고 고래고래하는 밤비와귀먹은 할아버지처럼 그려그려,를 반복하는흐뭇하던 날들. 어느 날에는 취직했다는 이야기,어느 날에는 설레는 연애 이야기를 해왔고 어느 날에는 연인의 건강을,어느 날에는 엄마의 영양제를 이야기하는보통의 날들이 우리 곁을 스쳐갔습니다. 통증이 등장하는 빈도는 이제 일 년에 한 두번,마음을 많이 끓이거나 과로한 날 그러한 정도로 지내고 있어요. 우리의 목표는 보통의 삶,이었습니다. 봄이 오면 꽃놀이를 가고 친구들과 1박 2일로 놀러가고가을에는 낙엽을 밟으며 걷는 보통의 삶. 누군가에게는 너무 쉽고 뻔하지만누군가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을만큼 대단한 그것. 그런 게 될까요,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밤비는 여러번 혼잣말처럼 말했고 그렇게 되면 나도 정말 좋겠는데 사실은 모르겠다고저도 긁적이며 대답했던 것 같고. 무어라도 웃게 해주고 싶어 시덥잖은 농담으로 공백을 메우다가자려고 누으면너는 혼자 끙끙 앓으며 긴 밤을 보내겠구나, 싶어눈이 쉬이 감아지지 않았고. 그런 시간들을 느린 기차처럼 과거로 흘려보내다가만난지 3년째 되던 봄, 밤비에게서 받은 연락은 이러하였습니다. 이것이 너의 첫 꽃놀이구나. 드디어 너의 힘으로 일어나너의 두 발로 걸어나갔구나.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는데 이 복잡한 마음은 팔순 잔치를 맞은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럴까...팔순을 안 맞아봐서 모르겠네... 여전히 아픈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지만 누구나 그 정도씩은 아프고 힘들다고 수긍할만한 정도이면 좋겠습니다. 남은 생 내내.접어놓았던 종이를 펴듯충분히 누리지 못한 긴 시간들까지 쭉쭉 펼쳐서 누리길,그간 보지 못했던 세상 아름다운 것들을모두 보고 살아가길. -나에게는 평생 소녀로 남을, 밤비에게.